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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너무도 바보같은 분이요,
우리는 너무도 멍청한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멍청한 우리가 스스로의 사랑을 깨닫길 기다렸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지나고 나서야, 잃어버리고 나서야, 당신이 가시고 나서야 그 사랑을 깨달았으니 이 또한 멍청함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고함을 치시지 그랬습니까! 고막이 터지고, 놀래 자빠지도록 고함을 치시지 그랬습니까! 이렇게 우리처럼 고함 치시지 그랬습니까! 목을 놓아 꺼이꺼이 우시지 그랬습니까! 그렇게 미소만 남기고, 그렇게 열정만 남기고, 그렇게 희망만 남기고 그렇게 떠나서 이 멍청한 이들을 울리지 말고, 당신이 한 번 먼저 우시지 그랬습니까! 이제 우리는 어떡합니까? 지켜주는 바보도 없이, 멍청한 우리는 어떡합니까? 한없이 받기만 했던 사랑이 떠나고 나면 받아만 와서 제대로 주지 못 하는 이 못난 사람은 어디에 사랑을 돌려줍니까? 이제야 깨달은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애닳아 차마 당신을 보낼 수가 없지만, 이제야 깨달은 우리의 무지는 너무도 안타까워 차마 당신을 놓을 수가 없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도 멍청할 순 없겠지요. 마지막 가는 길에도 울고 쓰러져 있을 수만은 없겠지요. 보내드리겠습니다. 보내드리지요. 다만 한 가지, 다음 번엔 당신이 멍청이 하십시오. 다음 번엔 내가 죽어라 사랑해주는 바보 할테니... 불면에 시달리며 맞은 아침은 괴롭기 짝이 없다. 오늘 하루는 뜨겁고도 차가운 하루였다. 아침에 있었던 뜻밖의 유감스러운 사건이 오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뜨겁다. 오늘 아침 몇몇의 사람들이 일상의 추위가 아닌 때 아닌 뜨거움으로 생과 사의 경계를 달리 했다.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세상을 향해 화염병을 던져야만 했다. 그들은 그 화염병을 통해서 자신이 조금 더 소중하게 인식되기를 바랐지만 결국 돌아보는 수고로움이 싫었던 세상 덕분에 생을 마쳐야만 했다. 그들이 죽어 간 이유는 뜨거웠기 때문이다. 불로 인해서 뜨거웠고, 살아가기 위해서 뜨거웠다. 그들은 영화나 드라마 같이 36도의 뜨거운 피가 통하지 않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비장하여 뜨겁지 않으면 생존하기조차도 어려운 이 현실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였기에 화염병을 던져야만 했다. 드라마 속에서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예쁘장한 옷과 예쁘장한 마음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냉혹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허름한 옷과 치열한 마음가짐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던 탓이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영화나 드라마 속의 피가 통하지 않는 무형의 캐릭터를 연상하고선 화염병을 이해하지 못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외침이나 절규가 귀에 들릴 리 만무하며, 고통과 구원을 원하는 목소리에는 그냥 인상을 찌푸릴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런 이들에게 이런 모습은 너무도 ‘드라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차갑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내 마음은 차디차기만 하다. 이 처참하고 끔찍한 사건을 보면서도 잠깐의 한숨을 내쉴 뿐이다. 분노와 증오란 잠시 잠깐의 스쳐지나가는 감정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슬픔마저도 이내 가라앉는다. 어느새 나는 그들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다. 지난 6월의 뜨거웠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은 ‘익숙함’이라는 새로운 존재다. 여름의 물대포 덕분인지, 무거운 내 몸뚱아리를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이게 만드는 분노는 겨울의 물대포 앞에서는 금세 식어버렸다. 여름의 사그라든 기억 덕분인지, 내 마음을 하얗게 불태웠던 증오 역시 이내 꺼져버렸다. 나의 마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감각의 역치 탓인가, 아니면 지금 정권자들이 보여줬던 기억 탓인가. 그 이상이 나오지 않는 것에 안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정도의 증오와 분노는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더 이상은 특별한 유인조차 되지 않는 것인가.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증오와 분노를 일상화시키고 있다. 권력의 횡포와 만행, 불의, 불인, 부정의, 그 모든 것을 넘어 사람의 목숨까지... 우리로 하여금 증오와 분노에 길들여지게 훈련시키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고, 나 역시 그러하다. 의도적으로 신문의 정치면을 넘겨 버리고, 웬만해선 알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증오에 익숙해졌고, 분노에 길들여졌으며...유감스럽게도 너무나 무력해지고 있다. 그런 탓에 작은 일에 예민해지고, 증오와 분노를 쉽게 표출하고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하는 일에 서툴러지고 있다. 쉽게 화를 내고, 쉽게 까칠해지지만, 무언가 진취적인 일로 향하는 에너지를 발산해내지는 않는다. 지난 1년여의 기억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내일이 되면 또 오늘의 일이 친구와의 술안주거리로 전락해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서글퍼도 그게 현실이라는...헛소리를 연신 해대고,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부정의한 행동이 어느새 부메랑처럼 팽그르르 돌아서 나와 나의 가족을 위협할 수도 있다. 그 때도 나는/우리는 익숙함의 함정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어쩔 수 없음’을 외치고, 시간을 약으로 삼아 한 순간의 술안주로 삼을 것인가. 쉽게 증오했다가 금방 꺼져버릴 것인가. 예전에 본 어떤 글 중에 독일의 나치가 횡행할 때, 한 사람이 옆집의 유대인이 잡혀갈 때도 ‘내 일이 아니어서’ 가만있었고, 옆의 공산당이 잡혀갈 때도 ‘내 일이 아니어서’ 가만있었다가 이후 자신이 잡혀갈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잘못 행동했음을 알았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어느새 팽그르르 돌아 나와 우리를,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가치들을 위해할 그들이 두렵다. 지금 당장 움직이자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의식하고 있자. 최소한 기억하고 있자. 최소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익숙함에 길들여지지 말고 인지해내자. 그들은 불 속에서 “살려달라고” 외쳤을 것이다. 목이 터지도록. 그들은 불 속에서 자신의 괴로움을 외쳤을 것이다. 목이 터지도록. 그럼에도 그들은 불 속에서 죽어야 했다. 아무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http://gggy.tistory.com/298
링크 걸린 곳에서 우연찮게 본 국민과의 대화에 대한 일본 네티즌들의 반응입니다. 한국네티즌, 특히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에서 좌익, 빨갱이로 몰기 좋아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아니라, 조중도에서 스스로 말하는 우경화하는 일본국민들의 반응이라, 더 유의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전 그 때 담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show라는 게 뻔한 순간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불쾌한 인물의 모노 쇼를 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죠. 반응은 역시 기대는 않았지만, 예상대로였더군요. 이명박 지지자분들, 일본인의 반응에라도 한 번 관심을 가지고 당신을 돌아보세요. 저들 중 한 마디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방송에 내일 비판 기사가 없으면 정말로 한국은 끝이군."-359번 반응
오늘 네이버에서 안재환 씨의 죽음이 기사로 뜬 순간, 이런 말이 회자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명심합시다. 불매운동의 목적은 안재환 씨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불매운동의 결과가 안재환 씨의 죽음인 것도 아닙니다. 이 두 가지 명제를 착각하거나 혼돈시키지 맙시다. 아, 한 가지 더. 죽은 사람은 그 동안 현실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살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고통받는 자신 외에 다른 것을 살필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제 그 고통의 짊을 던지고 차안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이에게 이런 더러운 논쟁이 필요한 지 의문스럽고, 한 편으로 고인에게 죄송스런 마음도 있습니다. 고인의 평안한 죽음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이제 그만 죄많은 입을 닫는 게 옳지 않는가 주제넘게 생각해봅니다. 온 나라가 더위와 올림픽의 도가니 속에 함몰되어 있다. 그러나 더위가 우리의 기력을 앗아가도, 올림픽이 우리의 눈과 귀를 잡아 둔다고 하여도 시계는 멈추지 않고 작동하고 있다. 내 삶을 알리는 시간도, 러시아와 그루지아의 전쟁 카운트다운도,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대적인 민영화의 카운트도... 출범 5개월 동안 수많은 부침을 경험한 이 정권에서는 무더위와 적절한 유화책, 그리고 올림픽 등으로 인해 유야무야된(혹은 희석된) 촛불 이후의 움직임에 일종의 자극이랄까, 유인이랄까 하는 것을 얻었던 듯 싶다. 지금의 한나라당과 청와대 및 기타 주류 보수 세력들 및 뉴라이트 계열이 친일적인 사고(어쩌면 사대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에서 상당수는 친일파와 적든 많든 연관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그들의 윗대가 그렇듯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영화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기득권을 잡고자 했던 정치가들이 이 땅의 국민들에게 던져 준 것은 '지역감정'이라는 형태의 '증오'였다. 이것 역시 자기 소속집단에 대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배타시하며, 그 메커니즘으로 '증오'라는 인간의 감정을 사용하고 있다. 로스쿨 법안이 국민들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었던 첫 번째 이유 역시 '변호사 기타 법조에 대한 불신과 증오'였으며, 의약분업에서도 국민들의 의견이 시시비비를 넘어 양 세력 중 어느 쪽에 더 '증오감'을 가지고 있는가로 귀결되곤 했었다. 공기업을 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극히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신의 직장'이라고 하며, 동경하며, 한편으로 그들은 역시 '신의 직장'이라는 이름으로 비꼬곤 한다.(이는 소위 졸부라고 칭해지는 이들을 향한 심리와 동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공기업 민영화에 찬성하'려'는 이들은(이들은 입장을 '찬성'이라고 정해놓고 근거를 찾기에 이렇게 표현한다) 이 공기업에 대한 '증오'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공공 기관의 부실 경영이 그들 공공기관 구성원의 방만 경영에 의한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이유로 그들은 일반 사기업처럼 더 힘들고 많이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민영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그런데 얼마 전 [포브스]지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은 OECD국가 중 가장 많은 노동시간을 '자랑'하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낮은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포브스]지의 말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 '정시퇴근'이란 곧 승진 불가를 의미한다고 한다. 자,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자. 현재 한국의 근로자들은 가장 많은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쓸데없는 야근 등이 너무도 많다고 한다.(괜히 주말에 회사 나가서 올림픽 보고 있다는 푸념을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직장에 대한 만족도는 현저히 줄어든다. 동시에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요한 덕분에 자기 개발을 위한 시간 투자는 생각해 볼 여력조차 없으며, 삶의 질 역시 감소하고, 부족한 휴식 및 자기 개발 시간은 사회 역꾼들의 창의성과 발산적 사고를 극히 저하시킨다. 이는 기본적인 발상 차원의 것으로, 추가적으로 사회학적 연구가 더해진다면, 쓸데없이 긴 노동시간이 얼마나 '노동생산성'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지 보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기업 민영화와 관련해서 공기업 근무자 및 공무원(공무원들도 같이 욕을 먹으므로 같이 쓴다)들을 소위 '더 굴려야 한다'는 사람의 발상은 고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사기업이 공무원 및 공기업처럼 변모하여, 불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이며, 노동생산성을 증진시킬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사회 전체적인 만족도와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사회 구성원들을 자기 개발에 더 몰두하게 하여 보다 경쟁력 있는 사회로 변모시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올림픽 보면서 느끼지 않았는가? 외국의 올림픽 선수들은 운동 외에 여타의 직업을 갖춘 생활 체육인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불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인 후 얻은 자기 개발 시간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끌어올린 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다음으로, 민영화 찬성론자들은 공기업이 맡고 있는 부분을 사기업에게 맡기면, 공기업의 비효율과 대국민 신뢰 하락 등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방법으로는 민영화로 인해 문제가 발생 예상 부분을 공적으로 보조, 규제하는 방식을 취하면 족하다고 한다.(서울대 행대, 김준기 교수)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와 같은 견해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이는 민영화가 저와 같은 공기업의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백번 양보하여 그 효과를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민영화된 기업(민영화가 되어 사적 소유권의 영역으로 포함됨으로써, 국가나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어지는데)이 발생시킬 수 있는 문제점을 어떻게 극소화된 보조, 규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쉽게 얘기해서 공기업의 경우는 국가나 정부가 필요에 따라 개입이 용이하여, 공기업이 발생시킬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쉽게 대응하고 예방, 규제할 수 있으나, 민영화가 되면, 개입 자체가 어려워져서, 설사 문제를 예상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지 않는 정도로만 대응할 수 있을 뿐인데다가,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한 공기업의 운영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 어떻게 극소수의 안전장치 밖에 없는 민영화의 운영에 대해서는 확언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 다음으로, 기본적으로 문제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법으로, 그것이 빨리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좋은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크다고 할 수 있다.(우리 사회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인, 사회의 문제점 등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심각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가령, 암의 경우처럼, 언제 발견되냐에 따라 환자의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기업의 부정 부패, 비리가 빨리 드러나는 것과 이미 만연한 이후에 드러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이런 면에서 볼 때, 사기업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가진다. 공기업과 공공 기관의 경우, 그 운영과 관련한 정보에 대해 신문이나 언론의 접근권이 훨씬 넓게 인정되는 반면, 사기업의 경우는 보다 어렵고 정보를 사기업 측에서 차단하기도 용이하다. 이는 기업 자체의 문제가 보다 더 치밀하고 깊게 형성될 수 있음을 의미하며, 결국 공기업의 운영보다 사기업의 운영에 있어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개연성이 높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다음으로 언론에서 수없이 때리고, 국민들이 불만을 갖는 것은 공기업의 '운영'이지, 결코 공기업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촛불집회가 한창이기 전에, 건보 민영화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나왔는데, 국민들은 건보의 현실화에 찬성하지, 결코 민영화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는 국민들 스스로가 공기업(혹은 공적 장치)의 '존재'에 대해 동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기업의 비효율, 일탈의 문제 및 신뢰 하락 등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공기업이 갖는 최고의 목적(Mission)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부수적인 문제라고 생각되며,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은 공기업의 '존재' 자체를 없앰으로써 해결할 것이 아니라, 공기업에 대한 감시와 제재의 수준을 높이는 등 보다 더 나은 수준의 운영으로 극복, 대처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이유를 넘어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나라 사람들의 중지가 모아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저런 변화의 영향을 온몸으로 맞게 될 이 땅의 국민들이 이에 대해서 충분한 생각이나 의견을 밝히지 않았고, 그에 대해 충분한 의견 수렴 절차가 없었다는 점이다. 정연주 사장과 관련해 법에 없는 해임권도 있다고 해석하는 이들은, 우리의 손에 의해 뽑힌 대표 나부랭이에 불과한 자들로써, 얼마든지 우리 손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우리는 선거철에만 눈과 귀와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여름 계절학기의 마지막 시험이 있다.
2008년 8월의 학위수여식 전까지 나는 여전히 이 학교의 학부생으로써 자리하고 있겠지만, 오늘의 시험이 끝나면, 공식적인 나의 대학생 생활은 끝을 맺는다. 좋았는지, 나빴는지, 효율적이었는지, 비효율적이었는지... 알 수 없다. 재어보려 해도, 채 제대로 잴 수도 없겠지만, 나의 길다면 길었던,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웠던 대학 생활은 아마 오늘의 순간과 함께 끝을 맞으리다. 이제 기껏해야 내게 잘 해줬던 법대 아주머니에게 음료수 한 병 선물한다던지, 지도교수님께 그간의 감사를 표하는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사실 얼마나 이 곳을 떠나고 싶었던가. 얼마나 졸업을 회피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보다 더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가슴 한 켠에 느껴지는 이 짠함은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지나간 시간들, 사람들, 흔적들, 실수들, 후회와 아쉬움이 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외친다고 해서 들릴리도 없고, 잡으려 한다 해서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한 그것들의 지나간 자욱에는 오로지 공허함만이 나를 반기고 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고시생인 나는 졸업을 한다고 해서 이 곳을 떠날 형편은 아니다. 여전히 몸은 이 곳에 메어 있어야 하는 탓에 혹 왠 주제 넘는 감상이냐고 핀잔을 준다고 한들, 채 반박할 말이 딱히 없다. 그러나 어디 감정이란 게 논리로 갈무리되는 것인가. 그냥 서글프고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무엇이 그렇게 내게 부정적인 감상만을 남기는 것일까? 채 제대로 된 배움이 없었다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남들이 목숨거는 학점 하나하나에 아쉬움을 갖지 않으면서도...좋은 친구들을 얻었고, 좋은 스승을 만나보기도 했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를 얻기도 했으면서... 잘 모르겠다. 혹 어쩌면 단지 내 지난 인생의 1/4이 어떻게든 흘러간 사실 그 자체가 아쉬운 건지도 모르겠다. 물 흐르듯 지나온 시간 동안...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주위의 벗과 후배와 룸메이트를 떠나 보내야 했고, 내 스스로의 인생의 굴곡을 헤아려야 했다. 그 와중에 발을 헛디디기도 하고, 상처를 부풀려 키우기도 했으며, 잦은 어리석음과 부족함으로 고생하곤 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나온 대학의 길은 잘 포장되어 멋진 차들이 달리는 고속도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엄한 비포장도로나 투박한 국도였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속도감 대신 국도나 비포장도로에서 달리면서 나는 무언가를 얻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내가 얻지 못 했다 하더라도 그 국도나 비포장도로는 내게 '무언가'를 주었을 것이다. 내가 아쉬운 것은 그 고속도로의 속도감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국도나 비포장도로를 선택한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이것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둘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둘 모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고속도로의 속도감을 느끼지 못 해 부러운 것 같기도 하고, 국도를 선택하고도 그 이점을 채 누리지 못 하는 어리석음에 아쉽기도 하다. 그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이렇게도 답을 못 내는 것을 보면, 참 답답하지만...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 물 흐르듯 지나온 시간 동안...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잘 버텨온 그 시간 동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부 2003-13169, 수고했어. 안.녕.
촛불시위의 강점은 무정형성이며, 다주체성(모든 이가 주체라는 의미), 비폭력성과 여론입니다.
그러나 이 강점은 장점인 동시에 촛불시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 언제나 두려움과 염려심을 가져왔습니다. 논의를 관통하는 전제로서, 연대는 어려우나, 분열은 쉽다는 점을 지적하고 개진합니다. 첫째로 무정형성은 자율성에서 비롯되어 촛불시위 참여자들의 다원적인 생각을 잘 담아왔습니다만, 결정적으로 목표와 목적, 다음 단계 설정에 필요한 의사 결정에 있어서 장애를 가지고 왔습니다. 더불어 시위 자체가 연대이기 때문에, 앞의 전제에 따르면, 분열에 대한 끝없는 걱정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의사 결정을 구축하기 보다는 두리뭉술한 결정만을 내리고, 세부결정 사항은 임의대로 이뤄지게 놔둘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저해시키고, 시위 자체의 역량을 결집시키기 보다는 여러 방향으로 낭비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여론입니다. 여론은 촛불집회의 기반으로서, 현재의 촛불집회가 이렇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기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론은 언제나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든든한 기반이기가 어렵고, 따라서 우리는 이 여론의 향방에 끝없이 주시해야만 하며, 결정적으로 '가상적인 여론의 향방'에 따라서 우리의 의사 결정을 제약받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현재의 여론이 촛불집회를 지지하는 것은 두 가지,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촛불집회의 비폭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자 중 하나, 특히 그 중에서도 시위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비폭력이 흔들리게 되면, 언제라도 양비론이 등장하여 여론을 흔들 수 있고, 이는 시위와 집회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셋째, 다주체성입니다. 다주체성은 모두가 공평하게 동등하게 참여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자체의 합리성을 도출해내는 데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체마다 연대를 하는 목적과 생각, 동인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 다주체성으로 인해서 시위나 집회의 성격이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다주체성을 비판하거나 부정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다주체성의 지나친 강조로 인해서, 집회나 시위의 주관자 내지는 집행의 편의를 가져올 수 있는 집단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시위대 자체의 부정적인 시각이 생겼고, 이를 통해 여론에서도 그런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잠재적으로 가지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향후 시위나 집회의 발전방향을 논의함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런 집단을 형성하게 될 경우(10만이 다 모여서 발전방향을 정할 수는 없으므로) 얼마든지 조중동 등에서 이를 좌빨이나 선동단체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촛불집회의 강점은 어느새 촛불집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발목을 잡는 기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촛불집회에 대해 지나치게 순수성(정치적인 부분에서 더더욱)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족쇄를 채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광장과 집회는 정치성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음에도 스스로 정치성을 배제하는 듯 하게 출발해버렸고, 정당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 순수성을 이용했기에,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성을 드러내게 될 경우 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편견과 싸워 이겨내야만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이제 촛불집회의 정치성을 드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집회를 통해서 무엇을 원하는지 목적과 목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행보에 대해 인터넷이라는 열린 광장에서 토론하고 민의를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장마철이 오고 있으며, 정부는 강경책에서 유화책으로 언제라도 돌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얼마든지 양비론 등으로 여론몰이를 할 수 있습니다. 동력을 집결시키고, 역량과 에너지가 외부로 허투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축제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치 투쟁을 하고 있음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전자만을 강조하여 정당성을 얻었지만, 후자를 부정하는 즉시 이 촛불집회를 유지하는 동력과 방향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시위장에서는 이명박 아웃을 외침에도, 온라인에서는 이 정치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저는 이 촛불집회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자 했으며, 지켜볼 것입니다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더 유연한 자세라고 할 것입니다. 저들은 단지 침묵하기만 하면 되고, 우리는 부단히 움직여야만 합니다.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결에서 알리는 포먼의 강펀치를 정확한 가드로 막으며 포먼이 지치기만을 기다리다 체력이 떨어지자 그 때부터 공세에 나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우리의 체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르겠고, 동력이 무한한지 의문스러운 저로서는, 알리처럼 가드만을 하는 현 정권이 두렵고 또 국민의 동력에 의문을 갖는 제 자신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꼭 이기고 싶습니다. 반드시 승리합시다. 농식품부에서 미국 측에 쇠고기 30개월 이상 부분에 대해 수출중단을 미국에 요청했다고 한다. 오늘은 그동안 생각해왔던 현정부의 외교와 관련하여, 기존의 정부들이 해왔던 외교전략, 정책과 대한민국의 외교 정세를 바탕으로 평가해 보고자 한다. 1. 동북아의 정세 동북아는 세계에서 가장 특이하고 주목할만한 지역이다. 이 동북아 정세에 개입하고 있는 중국-러시아-북한-한국-일본-미국, 이 6개국은 전 세계 10대 군사강국으로 평가되고 있다. 더불어 중국은 떠오르는 경제대국이자 매년 18%가량의 군비증강을 이뤄내고 있는 한 해 45조 이상의 군사비를 지출하는 군사강국이며, 러시아는 냉전시대의 양대산맥으로, 경제 발전이 더뎌 군사력이 쇠퇴했으나, 최근 천연 가스 등을 비롯한 유전 사업의 발전으로 경제강국, 군사강국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북한은 핵 등 비대칭전력이 극도로 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예측불가능한 국가로, 외교적으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국가이다. 일본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군사강국, 경제강국으로, 일본이 4개를 보유하고 있는 8-8(함정-헬기)함대는 그 중 하나만으로도 대한민국의 해군을 능가한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미국은 중국의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는 군비에 반발하지만, 한 해 450조 이상을 군비로 쓰는 최강대국이다. (게다가 이라크, 아프간 파병은 제외한 금액이다) 대한민국의 외교적 상황이 보이는가? 동북아 지역은 경제적으로 세계 최고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지역이라, 경제전쟁의 접전지이면서, 군사적으로 가장 치밀하면서도 가장 암묵적인 분쟁이 이뤄지고 있는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이다. 기존의 북한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림팩으로 대두되는 미-일 동맹에, 최근 계속된 군사훈련을 통해 견고해지는 중-러 동맹의 대립까지... 이런 상황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갈 길은 얼마나 멀고도 험한 것이던가. 예전에 누군가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10만 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했으나, 어쩌면 더 필요한 것이 1천의 정예 외교요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만큼 대한민국의 외교적 상황은 특별하다. 2. 동북아 속의 대한민국 외교(예전-국민의 정부까지) 그 간의 대한민국의 행적은 어떠했을까? 오랜 예전부터 YS의 문민정부까지 이르는 시기는 오로지 미국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외교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특이할만한 일은 공산국가들의 붕괴와 발맞추어 북한과 대화를 어느 정도 시작했다는 점과 대만을 버리고 중국과의 외교 통로를 개척하는 것 정도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 집권세력들의 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는 당연한 귀결이었기에 특이한 점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 외의 모든 외교 행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미외교의 부산물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중국과의 외교 개통도 중국의 UN가입이라는 미국의 조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기는 하지만) 그런데 DJ정권 이후로 대한민국의 외교 행적은 다소 상이해졌다. 그 이전까지 동북아정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외교가 ‘only 미국’이었다면, DJ이후로는 외교의 축이 다극화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국과의 외교 비중도 다소 커졌고, 햇볕정책 이후로 ‘통미봉남(미국과 통하고 남쪽을 봉한다)’의 북한과의 외교 비중은 상상초월의 수준으로 바뀌었다. 3. 동북아 속의 대한민국 외교(참여정부) 직전의 노무현 정권은 어떨까? 참여정부 초기에는 중국과의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 외교의 핵심이었다고 생각된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대한민국의 가장 친밀한 친구였던 미국이 다소 의아할 만큼(중국은 미국의 잠재적 주적) 중국과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변화하는 동북아의 정세를 밀접하게 고려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급격히 부상하는 중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동북아 정세의 다극화를 고려하여 기존의 대미외교에만 얽매어 있던 한국 외교의 유연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북전략에서는 승계 여부에 논란이 일었던 햇볕정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북한과의 친밀한 관계를 꾸준히 유지함으로써, DJ시절에 이룩했던 화해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자 노력했고, 이어서 화해의 분위기라는 틀 위에서 협력이라는 새로운 분위기를 창출하고자 노력했다. 그 와중에 서해교전과 미사일 실험, 심지어 북핵실험 문제까지 붉어져 나왔지만, 대북정책의 기조는 흔들림이 없었다. (조중동 등 일부는 이를 안전불감증이라고 하지만, 북한과의 친밀한 관계가 가져온 결과물(소위 북풍 등의 안보문제로 국민의 의사를 왜곡시키는 등의 문제가 발생않게 됨)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런 틀이 있었기에, 북한이 벼랑끝 전술로 내놓은 북핵 문제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평화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참여정부는 동북아 균형자론이라는 이름으로 동북아 정세에서 한국이 균형자적 입장을 띔으로서, 외교적 우위를 얻을 수 있는 전략을 제시했다.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동북아 정세가 미,일 - 중,러 식의 경쟁 양상을 띄고 있을 때, 이제까지 한국은 대미전략에 치우쳐 미,일(한) - 중,러(북) 식의 양상을 창출해냈다. 그런데 동북아 균형자론과 햇볕정책을 통한 친북한 전략, 그리고 친중국 전략을 통해 동북아 정세에서 한국은 미,일 - 한국 - 중,러,북 식의 양상을 창출해냄으로써, 6자회담을 이끌어내는 계기를 만들어냈고, 동시에 6자회담에서 균형자이자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외교적 지분을 스스로 창출해냈고, 얻어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동북아 외교 정세의 균형자적 지분을 얻어냈다고 생각한다. 균형자라는 말이 단순히 봉건제 시절의 ‘중앙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나, 대립하는 양대세력 사이에서 무게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는 지분을 가진 ‘캐스팅보트’의 의미라면 당시 우리는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해냈다고 생각한다. 이후, 한미FTA와 함께 참여정부는 취임 초기와의 외교노선과는 다소 상이한 외교전략을 취하게 된다. 당시 중국이 대한민국과의 FTA를 고대했던 점을 고려하면, 중국과의 fTA를 포기하고, ‘말많은’ 미국과의 fTA를 계획하고 추진한 배경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언급하기 어려운 것이, 미국과의 FTA 추진이 미국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지, 동북아 정세와 관련하여 외교, 국방적 이익을 도모한 것이었는지 쉽사리 단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는 한미FTA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미관계가 급속히 발전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뉴욕포스트는 노무현은 예측할 수 없는 리더였지만, 그의 시절에 동맹이 강화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다만, 놀라운 점은 중국의 반응인데, 한미 FTA 등을 비롯한 대미동맹의 강화에도 중국이 크게 반응을 보이거나 걱정한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이명박의 친미 성향에 당선인 시절부터 중국이 걱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그 동안 쌓아왔던 친중국 전략의 결실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경우, 참여정부 시절의 주요 외교대상국은 아니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정치인들의 독도 망언으로 시작해, 왜곡된 역사교과서와 독도 조사 사업까지 터지면서 한일외교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점이 어떤 문제를 일으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동아시아 외교의 두 축은 미국과 중국이다. 한-미 동맹은 반세기 이상을 자랑하는 기반을 갖추고 있고, 중국에게는 침략 역사가 있고, 영토 분쟁이 있는 일본보다 한국이 보다 편한 외교 상대국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과의 외교는 한국으로서는 급한 상황이 아니었다. 도리어 일본의 경우, 6자 회담에서 북한이 가장 꺼리는 대화 상대국으로 찍혀, 동북아 정세에서 가장 손해를 본 국가가 되었다. (이런 점에는, 미국의 의사에 일본이 극단적인 반발을 표할 리 없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외교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연출해낸 참여정부 시절의 외교정책은 합격점 이상의 점수를 받을만하다. 동북아의 중추인 미국, 중국 양자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북한 역시 잘 다룸으로써, 동북아 외교 정세에서 큰 수확하였기 때문이다. 4. 현재의 대한민국 외교 상황 이명박 대통령(이하 이명박)의 경우, 친미성향이 경선 시절부터 우려되었다. 이에 당선인이 되고 난 이후, 중국은 한국을 외교상대국 지위를 한 단계 더 상승시키려는 계획을 마련하기도 했다. 북한의 경우는, 지속적으로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대북전략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미국과 일본은 한쪽에서 웃음을 감추고 있었다. 4.1 대북외교 북한과의 분쟁, 알력은 이미 예상된 결과였다. 북한은 줄곧 한나라당과 이명박에 우려를 표해왔고, 한동안 보기 어려웠던 비난방송과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휴전선 이북에서 공무원들은 모두 쫓겨나기에 이르렀고, NLL을 둘러싸고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와중에 북한은 가장 우려했던 ‘통미봉남’ 전략을 다시 시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이 각종 조건을 달며 식량지원을 등한히 하는 사이에, 미국은 북한에 직접적으로 식량지원을 하게 되었고, 북한 역시 맘에 안 드는 한국이라는 친구에 구태여 손 벌릴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이는 식량지원을 카드로 외교적 우위를 꾀하고자 했던 한국의 대북전략에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왔다. (정권이 베스트 프렌드라고 말하던 미국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4.2 중국외교 중국과의 외교 역시 문제가 많다. 중국이 이명박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해왔다는 점은 이미 언급했다. 이명박의 친미 성향은 DJ와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쌓아 온 한-중 외교의 성과를 흔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으로서는 동북아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한국과의 친밀한 외교가 필수적이다. 특히 올해 중국은 말 많고 탈 많은 국제적 행사인 올림픽을 북경에서 치르기에 더욱 필수적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명박은 대북외교에서 DJ, 노무현 정권과는 다른 접근법을 들고 나왔고, 중국은 이 정권이 과거와는 다름을 인식했을 것이다. 이후 이명박은 첫 순방국으로 미국-일본을 정하는 한편, 쇠고기 협상을 타결하고, FTA 비준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중국이 우려하던 친미적 성향을 유감없이 뽐냈다.(대북강경책의 와중에 친미정책이 펼쳐졌으니, 중국의 입장이라면?) 당시 중국은 티벳 사건으로 세계적으로 압박을 받는 상황이라 외교 상대국이 절실했었다. 아마도 한국과 일본이 그 타깃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후진따오는 일본을 선택했다. (참고로, 중-일은 올해 초, 농약만두와 일본 기자의 스파이 파동으로 반일-반중 감정이 극도로 치닫는가 하면, 후진따오의 일본행을 중국에서는 극도로 만류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참여정부였다면, 외교적 고립에 빠질 수 있었던 중국의 순방국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구원투수로 등장할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지 않았을까? 4.3 일본외교 이명박은 일본에서 천황을 천황이라 칭하고(이제껏 일왕이라 칭함), 목례를 하면서, 과거의 일을 덮어두자는 식의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 그의 실용에 따르면, 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는 반(反)실용이라고 할 것이다. 참여정부의 외교를 언급하면서, 우리는 일본에 굳이 목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명박은 스스로 일본으로 건너가, 우리와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해줄 것을 요청했다. 쉽게 말해,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뺏기지 않았던 주도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것도 언제라도 꺼내어 일본의 외교 전략에 딴죽을 걸 수 있는 역사 문제, 독도 문제라는 히든카드마저 넘겨준 채 말이다. 4.4 미국외교 미국과의 외교는 굴종의 외교라는 말 외에 더할 말이 없다. 졸속으로 치룬 쇠고기 협상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교황이 미국에 방문하는 시점에 같이 방문하는 ‘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방문일자로 미국에 과연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왔을지도 의문스럽다. 아니, 어찌 생각해보면, 미국과 미국민에 큰 영향을 못 행사하고 온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4.5 동북아 정세의 변화 참여정부 시절, 한국은 캐스팅 보트를 쥔 국가였다. 미,일-한-중,러,북 상황에서 미국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통로로 이용하기에 유용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 일본에 보다 친밀한 모습을 보여, 미,일,한-중,러,북 식의 양상이 된다면, 그리하여 한국을 거치고 얘기하는 것이나 거치지 않고 직접 얘기하는 것이나 동일하다면, 중국이나 북한이 구태여 한국을 통로로 거칠 필요가 없다. 미국 역시 한국의 존재를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다. (중-한 관계가 중-미 관계보다 더 돈독하다면, 중국으로서는 직접 껄끄러운 미국을 상대하는 것보다 미국과 친하면서 자신과도 친한 한국에게 입장을 설명하여 양자의 협상을 이끌어내는 촉매로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학에도 이명박 정부는 후자의 경우를 택했고, 그 결과로 중국은 대화상대자로 한국이 아닌 일본을 택했고,(일본이 한국보다 미국과 친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동북아에서의 지분도 일본이 크니, 중국 입장에서는 중-한, 중-일 관계가 동등하다면, 한국보다 일본이 더 매력적인 상대국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미 속내를 다 보인 한국의 사정을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더불어 북한은 중국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한국이 아닌 미국과의 대화에 전력투구를 하며, 어렵게 구축해놓은 다자회담(6자회담)의 방식이 아닌 북-미 양자회담의 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어렵게 유지해온 ‘캐스팅보트’의 지위와 지분을 상실했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전략은 거의 재앙 수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냉전 속에서 스위스가 취했던 외교적 이익을 꿈꾸어야 했음에도, 스스로 그 역할과 지위를 차버렸다. 덕분에 대한민국이 동북아 외교 정세에서 얻어낼 발언권은 현격히 떨어졌고, 지위는 ‘대한민국’에서 ‘미국 측’으로 격하되었다. 외교란, 국가 간의 인간관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계산이 주가 되기에, 우정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사회생활 속에서 흔히 하는 인간관계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 속에서 신뢰를 쌓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한편으로 신뢰를 잃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지금의 지위를 유지하는 일도 얼마나 벅찬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우리는 어렵게 쌓아왔던 신뢰를 스스로 차버렸고, 어렵게 일구어낸 지위와 지분을 스스로 포기했다. 이제 앞으로 스스로 포기했던 것들을 다시 쌓아가야 하는데,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과정이 될지 걱정과 아쉬움이 가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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