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과 생존 경쟁, 그 끝의 정치무관심
부제 : 불편한 진실에 대해 말하다.


불편한 진실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앨 고어가 한 말로 알고 있지만, 이 말을 필자는 '진실이 도덕적, 물질적, 심리적 불이익이나 불편함을 가져다 주는 경우'의 의미로 종종 사용하곤 한다. 가령, 할아버지가 친일을 한 경력 등이 그 비견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언제나 궁금증의 대상이기도 한 청년층의 정치 불감증 및 관심 없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니, 그것이 아마도 이 불편한 진실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필자는 불편한 진실은 그것이 불편함을 느끼는 개인에 대해 '불리한' 진실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비단 그런 개인적인 사정만이 불편한 진실의 면모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필자가 후배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가치의 옳음에 대해서 얘기하던 필자에게 그 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오빠의 말이 맞다는 건 나도 알겠는데, 그렇지만 그 얘길 듣는 게 꼭 유쾌하거나 즐겁진 않아." "응? 무슨 말이야? 정확하게 말해봐?" 그러자 그녀는 "내가 만약 나이가 더 들어서 그런 생각보다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내 일을 하고 산다면, 그렇게 소시민과 같은 삶을 산다면, 오빠의 말이 옳다는 것과 무관하게, 오빠의 말은 내 지난 삶을 초라하게 만들 것 같아." -후략-
그 이후에 나는 나의 말이 그런 삶을 부정하거나 초라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진보적 가치에 손사레를 치는 집단의 심정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이해를 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보릿고개를 거치는 것이 너무도 힘겨웠던 그 시절에,
그들은 여러 가족 구성원들을 무사히 살려내야 하는 지상 최대의 가치를 가지고 살았다. 덕분에 그들은 가치의 시대가 아닌 무가치의 시대를 살아야 했고, 삶이 아닌 생존을 희구해야 했다.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말씀했던 바처럼, 옆에서 부정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약자를 부당하게 짓밟고 있어도, 눈 감고 귀 막고 고개를 떨궈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 자신만이 아닌 그들로 인해 생존할 수 있는 이들을 구하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들은 수많은 가치 갈등을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옳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가만 있어야 하는가? 혹시 내가 부당과 부정의에 맞선다면, 내게 불이익이 없을까?' 수많은 고민과 가치 갈등의 끝에서 그들은 가치가 아닌 생존을 택해야만 했고, 그것은 누구도 비난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나아가 그러한 고민과 가치 갈등의 시간과 순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버려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 없이는, 그들은 엄혹한 시대에 매 순간 가치 갈등과 고민을 마주하게 되고, 도덕적, 윤리적, 심정적으로 비겁한 행동을 한다는 자괴감을 맞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가치의 옳음을 판단하는 기능을 잃어갔고, 버려갔다. 그것은 생존이 우선인 시대에 그들이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더 '적절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마치 진화론의 그것들처럼...

그들에게 오늘의 시대는 당혹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치 시대를 생존한 독일인들은 그들 후세가 "왜 저지하지 못 했냐?"는 물음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권위주의 대신 찾아온 민주의 시대, 무가치나 생존이 아닌 가치와 삶이 경주하는 시대는 그들의 눈 앞에는 예전 그들이 스스로 가치와 옳음을 버려야 했던 것보다 수백배의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모든 가치를 버리고 선택한 생존을 위한 피와 땀과 눈물을 버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이 든 이 특유의 완고함, 3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선택하고 추종해서 내 한 몸이 되어버린 삶의 방식, 내 삶에 대한 모욕감, 수치심 등등 수많은 감정이 그들의 마음 속을 헤집어 놓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에게 익숙함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들 중 상당수는 그들을 '콘크리트'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콘크리트다. 콘크리트처럼 변하지 않고, 제 자리에 주저앉은 채, 뭐가 옳고 그른지 알지 못 하고 행동하는 일이 잦다. 그러나 그 콘크리트 덕분에 지금 우리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이 가치 대신 생존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이 또 다시 그 선택을 강요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적어도 오늘날 이렇게 컴퓨터를 통해서 우리의 의사를 자유롭게 밝히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참고, 이 발전의 모두는 박정희의 공이 아니며, 그 엄혹한 시대에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땅을 수놓은 아버지, 어머니들의 공로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한편, 요즘의 젊은이들은 또 다르다.
그들은 일제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국민과 닮아 있다. 그들은 1960년대를 버텨야 했던 이들과는 또 다른 의미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있다. 1990년대 이전의 청년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기 쉬웠다. 그리고 그 옳음을 위해서 자신을 불살랐다. 그들에게는 1987년의 성공이 강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일군 것은,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아닌 바로 우리'라는 자신 속에서 그들은 살아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옳음이라는 가치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전된 대한민국은 그 시대의 청년들에게 폭 넓은 기회를 제공했다. 어둠이 아닌 밝음과 비겁을 이겨낸 용기가 그 시대 청년들의 삶 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청년들의 삶은 밝음 대신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다.
IMF이후 대기업은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오로지 정리해고와 명퇴만을 추종했고, 노동의 유연화는 점점 더 극으로 달하고 있다.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 버렸고, 과거처럼 좋은 대학만 나오면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시대는 종언을 선언했다. 덕분에 좋은 대학 학생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학생 운동이나 가치 문제에 목을 메지 않는다. 대신 좋은 직장 구하기에 목을 멜 뿐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경쟁이 극도로 심해져서 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쟁탈하는 새로운 생존의 시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 모른다. 왜 이게 신 생존 시대인가, 과거에는 정말 못 먹고 살았지만, 요즘에는 먹고 살 수는 있지 않는가? 과거보다 더 심해진 자본주의와 사회적 시선, 더 치열해진 스펙 경쟁, 극도로 치닫는 노동유연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조금 더 위에 서지 않으면 당신도.."라고 재촉하고 있다. 물론 대기업과 같은 몇몇 좋은 직장에서는 풍족한 소유를 보장해준다. 그러나 풍족한 소유는 특정 일부에게만 보장될 뿐, 수많은 실직자 및 실업자들에게는 요원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Mc Job일 뿐이다. 이런데도 새로운 생존의 시대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 속에서 청년들은 1960년대 아버지 세대들이 받았던 선택을 다시 강요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년들은 그 속에서 불편한 진실을 실감하고 있다.
그들은 경쟁 뿐만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고 정의나 옳음을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못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줄세우기는 그들의 기본적인 자신감을 떨어뜨렸고, 민주화 이후 옳음이 불분명해지고, 투쟁의 대상은 분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과거 90년대 세대처럼 그들이 일으킨 변화가 가져오는 성공의 자신감을 경험하지 못 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노도와 같이 일어나 광화문 앞에 무려 50-60만이 모여서 우리의 뜻을 밝혔고, 촛불시위는 2,3달여의 기간 동안 반복되었지만, 변화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심화된 경쟁 구조 속에서 자신을 잃었고, 더 이상 그들이 옳음을 위해 투쟁하더라도 변화는 없다는 결정적 패배감에 빠졌다. 수익이 나지 않는 곳에 투자를 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이다. 그들의 패배감은 그들의 불편함으로 직결된다.
그들은 더 이상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갖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관심을 갖고 변화를 시키려해도 변화되는 것은 없이 지독한 경쟁 체제 속에서 자신만 뒤로 밀릴 뿐이기 때문이다. 이미 경제 관념에 충실한 세대에게 이것은 너무도 비효율적인 투자일 수 밖에는 없는 것. 옳지 않음을 보고 일어서도 변화 없음(실패=효율0)을 경험한 그들은 1960년대의 청년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불편함과 가치 갈등을 일으킬 '불편한 진실'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명박이 뭐라고 했건, 한나라당이 뭐라고 했건, 그것을 보고 분노를 느낀 듯, 일어설 용기가 있더라도 변화는 없고, 일어서지 않으면 갈등과 무기력만을 경험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연스런 생존 본능(스트레스를 지양하는)에 따라 그 불편한 진실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감정을 이해한다.
우리가 던진 회심의 직구를 저들이 물리쳐 버렸을 때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과거에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았지만..)그렇지만, 필자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써, 그들이 가슴 속에 적어도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마음만은 잊지 않기를, 혹은 잃지를 않길 바란다.
내가 위에서의 그녀에게 한 말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온 시대를 꿰뚫는 정의를 찾아서 구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 분들의 삶은 소시민의 것이 아니요, 당시로서 그들 자신이 발할 수 있는 최대한의 희생이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화했다. 더 이상 시대는 그러한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다. 변화에 따라 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독립군이 되는 것, 자신의 가재를 모두 쏟아부은 것만이 독립 운동인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가 보낸 코 묻은 돈, 김밥 할머니가 전해 준 그날 하루의 일당 모두가 독립 운동인 것이요, 시대의 정의를 구현하는 행동인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생을 지키기 위해 동조하지 않겠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아집이요, 소시민의 삶인 것이다."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녀는 공감을 해주었다. 이 말이 나이드신 분들께 통할 지는 모르겠지만..적어도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면서 괴리감을 느낄 이들에게는 공감을 얻을 지 모른다는 희망을 느꼈다.

필자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20대이다.
현재의 삶이 얼마나 엄혹하고 잔인한 것인지 결코 모르지 않는다. 실로 체감하고 있다.
홍세화씨와 사석에서 만나서 얘기했을 때, 그분은 내게 "지금의 마음을 잊지 말고, 큰 사람이 되어서 그 마음을 토해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려다 그 분이 그걸 모를 리 만무하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20대로써 청년들에게 바라는 바는, 지금 움직이지 않더라도 무엇이 옳은 것인 지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존을 넘어 삶을 바라보게 된 순간, 생존을 위해 피땀을 쏟고 있는 이들에게 정의와 진리를 보여주자는 것이다.

비난은 무엇보다도 쉽다.
특히 타인들과 함께 하는 비난은 더 쉽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해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비용은 더 들고, 수익은 딱히 비난보다 나아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시대의 진정한 화합을 꾀한다면, 비난 이전에 화합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함은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콘크리트라는 말을 싫어하고 국개론은 경멸한다. 20대의 청년들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심정에서 바라봐주는 것도 또한 필요한 일이고, 비난보다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20대의 청년들 역시 여전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진보 진영의 명사들이 한나라당에 입당할 때면, "소금을 부어 본 들, 바다가 짜지나. 바닷물에 녹고 말지."라고 말을 했지만, 우리의 20대는 바다를 짜게 만드는 바다에 녹지 않는 강렬한 소금이기를 기원해본다.
나도 이 조악한 글을 쓴다고 경쟁에 뒤쳐지게 되었다. ^^; 다시 들어가야 겠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한 구절을 적어 둔다.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힘들고, 어렵기에 나는 이 길이 진실과 정의로 가는 길임을 믿는다.




ps.

 

어쩌면 애초에 신자유주의란 그런 것이다.

신자유주의란 개인의 경쟁을 통해서 더 나은 사회의 혹은 고용주의 효용을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에 의거한 바, 그 지나친 경쟁에 인간적 개성이나 창의의 발현은 차후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을 거대한 톱니바퀴 속 하나의 부속으로 생각하기에, 닳으면 언제든 바꿀 수 있고, 조금 더 나은 톱니를 찾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사람을 생존 경쟁으로 돌입시키고, 적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극한을 지칭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동시에 패자는 쓰러져야 하고, 적자는 아무런 스스럼 없이 패자를 밟고 일어서는 것이 또한 신자유주의인 것이다. 나는 단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밟아 버려야 했던 패자들을 돌아보는 이가 되자는 것이다. 일종의 르네상스의 도래처럼 말이다.

 

by 蒼天 | 2010/01/08 20:16 | 短想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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